세종대왕 가계도 충녕대군 시절부터 왕이 되기까지의 스토리
이 블로그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음슴체'를 사용하며, 다소 낯설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높이기 위한 표현 방식이니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왕이 되기 전 충녕대군은 이미 준비된 군주였다.
세종대왕 가계도에서 태종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학문을 사랑하며 조용히 왕위를 준비한 충녕대군.
형인 양녕대군의 방탕함 속에서 태종의 신임을 얻으며 왕이 될 길을 스스로 개척함.
하지만 단순히 책만 읽는 모범생이 아니었음.
"왕이 될 사람은 결국 왕이 될 것이다."
"그는 세자가 아니었지만 스스로 왕이 될 길을 만들었다."
이제 왕이 되기 전 세종대왕 가계도 속 충녕대군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태어나면서부터 평범하지 않았다.
세종대왕(1397~1450)은 조선 제3대 왕 태종과 원경왕후 사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남
세종대왕 가계도를 보면 형 양녕대군과 효령대군이 있었기에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음.
충녕대군이 태어나기 전 그의 부모는 이미 3명의 아들을 잃은 상태였음.
양녕과 효령은 친척집에서 자랐지만 충녕(세종)만은 부모 곁에서 자랐음.
태종과 원경왕후가 유독 충녕을 아꼈던 이유임.
이때부터 태종은 충녕대군을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을지도 모름.
어려서부터 남다른 학문적 열정
📌 책을 닳아 없어질 때까지 읽을 정도로 공부를 좋아함.
📌 병이 나서 태종이 책을 모두 치워도, 몰래 숨겨둔 책을 계속 읽었다는 일화가 전해짐.
📌 태종도 그의 학문 열정을 인정하고 적극 지원함.
하지만 그렇다고 책만 읽는 조용한 왕자가 아니었음.
충녕은 왕이 될 준비를 차근차근해 나가고 있었음.
양녕대군 폐위 속에서 기회를 잡다
세종대왕 가계도에서 왕위 계승자로 지목된 형 양녕대군은 원래 왕이 될 운명이었음.
하지만 술과 여색을 즐기며 왕의로서의 자질을 점점 잃어감.
👀 그렇다면, 충녕대군은 어떻게 행동했을까?
공적인 자리에서 형과 대비되었다.
📌 총명함을 드러내며, 신하들에게 호감을 줌.
📌 양녕이 방탕할 때마다 태종 앞에서 모범적인 모습을 보임.
➡ 태종은 점점 충녕대군을 신뢰하기 시작했고, 신하들조차 그를 인정하게 됨.
📌 심지어 명나라 사신조차 "충녕대군이 왕이 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결국 태종의 결단이 내려짐.
1418년 양녕대군 폐위&충녕대군 세자로 책봉!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음.
태종은 곧바로 왕위를 넘기고 상왕이 되어 아들의 길을 지켜보기로 한다.
(세종대왕의 왕세자 기간은 단 두 달이었음)
하지만 이는 세자에서 곧바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철저한 보호 속에서 왕이 된 것임.
준비된 군주가 왕이 되다
1418년 세종은 22세의 나이로 조선 제4대 왕이 됨.
태종은 상왕으로 남아 4년 동안 왕권을 보호해 줌.
세종이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강력한 후견인 역할을 해준 것임.
덕분에 즉위 초반에도 왕권이 흔들리지 않았고
세종대왕의 개혁과 연구는 방해받지 않고 추진될 수 있었음.
왕이 된 후 세종대왕은 조선을 변화시키는 개혁자가 됨.
👀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질문.
만약 세종이 학문만 했던 왕자였다면, 과연 왕의 자리에 올랐을 수 있었을까?
세종대왕은 야심 있는 왕자였다?
일반적으로 세종대왕은 욕심 없이 왕이 된 성군으로 묘사됨.
하지만 충녕대군 시절 행동을 보면 그도 왕이 되고 싶어 했던 인물임을 알 수 있음.
📌 형의 비행이 심해질 때,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부러 총명함을 드러냄.
세자가 기행과 방탕함으로 입지가 약화되었을 때 때마침 충녕대군이 공적인 자리에서 학문과 지혜를 드러냄.
태종은 세자를 꾸짖는 동시에 충녕대군을 칭찬.
신하들도 이에 동조하며 자연스럽게 비교가 됨.
📌 세자의 행동을 직언
양녕이 매형 이백강의 기생을 빼앗으려 하자 충녕이 "한 집안에서 그런 짓을 하느냐" 며 꾸짖음
세자가 "나 새 옷 장만했다"라고 자랑하자 "먼저 마음을 닦으라"라고 충고함.
이 말을 가슴에 두고 있던 세자가 "충녕은 심약한 놈"이라고 헐뜯자 태종은 오히려 충녕은 결단력이 있다며 두둔함.
📌 정치적 감각과 위기관리 능력을 갖춘 인물이었음
충녕대군이 태종이 즉위한 데 큰 공을 세운 남재에게 연회를 베풀던 중이었음.
남재가 과거 태종에게 학문을 권했던 일을 언급함.
당시 태종은 "왕위도 못 잇는데 학문은 해서 뭐 하나?"라고 말함.
남재는 "임금의 아들이라면 왕위에 오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했다고 함.
그러면서 "대군께서 학문을 좋아하시니 기쁩니다"라고 함.
이 말은 곧 충녕대군도 왕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음.
자칫 역모로 몰릴 수 있는 위험한 발언.
충녕대군은 남재를 꾸짖거나 역모로 몰아 고발하지 않고 아버지 태종에게 조용히 보고하는 방법을 택함.
태종은 보고를 받은 후 "그 늙은이 과감하구나!"라며 가볍게 웃고 넘어감.
만약 충녕대군이 남재를 꾸짖거나 역모로 몰아 고발했다면.
남재는 끌려가 심문을 받고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될 가능성이 높아짐.
심지어 충녕대군 자신도 '왕위를 노린다'라는 의심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었음.
하지만 즉각적인 대응을 피하고 태종에게 신중하게 보고함으로써 스스로의 입지를 다지면서도 불필요한 논란을 피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임.
➡ 즉, 세종대왕은 단순히 책만 읽던 사람이 아니었다.
➡ 왕이 될 가능성을 스스로 만들어 나갔던 인물이었다.
👑 "왕이 될 운명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운명적으로 왕이 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왕이 될 길을 개척한 인물이었음.
그리고,
그가 왕이 되었을 때 조선은 완전히 새로운 나라가 되었음.
세종대왕 가계도를 통해 본 운명
세종대왕 가계도를 보면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에 원래 왕이 될 운명이 아니었음.
하지만 스스로 왕이 될 준비를 했고 태종과 신하들의 신임을 얻어 왕위에 오르게 된 것임.
왕이 된 후에는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분야에서 혁신을 이룸.
단순한 행운이 아니 철저한 준비와 실력이 그를 왕으로 만든 것임.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대왕.
그는 우연히 선택된 인물이 아니었음.
경솔한 행동을 하지 않고, 위기 속에서도 침착하게 대응하며 불필요한 위험에서 지혜를 발휘하는 능력을 갖춤.
이러한 신중함과 지혜가 결국 왕으로 즉위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함.
세종대왕 가계도
세대 | 관계 | 이름 | 생몰 | 비고 |
조부 | 할아버지 | 태조 이성계 | 1335~1408 | 조선 건국(1392) |
조모 | 할머니 | 신의왕후 한씨 | 1337~1391 | 태조의 첫 번째 왕비 |
부 | 아버지 | 태종 이방원 | 1367~1422 | 조선 3대 왕 |
모 | 어머니 | 원경왕후 민씨 | 1365~1420 | 태종의 왕비 |
본인 | 조선 4대 왕 | 세종대왕 이도 | 1397~1450 | 조선 최고의 성군 |
형 | 첫째 형 | 양녕대군 이제 | 1394~1462 | 폐세자 |
형 | 둘째 형 | 효령대군 이보 | 1396~1486 | 불교에 귀의 |
아우 | 동생 | 성녕대군 이종 | 1404~1418 | 요절 |
배우자 | 왕비 | 소헌왕후 심씨 | 1395~1446 | 세종의 정비 |
자녀 | 장남 | 문종 이향 | 1414~1452 | 조선 5대 왕 |
자녀 | 차남 | 세조 이유 | 1417~1468 | 조선 7대 왕 |
자녀 | 3남 | 안평대군 이용 | 1418~1453 | 계유정난 희생 |
자녀 | 4남 | 임영대군 이구 | 1420~1469 | 학문에 조예 |
자녀 | 5남 | 광평대군 이여 | 1425~1444 | 요절 |
자녀 | 6남 | 금성대군 이유 | 1426~1457 | 단종 복위운동 실패 |
자녀 | 7남 | 평원대군 이정 | 1427~1445 | 요절 |
자녀 | 장녀 | 정의공주 | 1415~1477 | 이보와 혼인 |
자녀 | 차녀 | 경안공주 | 1418~1464 | 이준과 혼인 |
📌 세종대왕 가계도를 보면, 그는 태종의 셋째 아들이었으나 형인 양녕대군의 폐위로 왕이 되었음.
📌 그의 자녀 중 장남 문종이 5대 왕이 되었으나 요절, 이후 차남 세조가 7대 왕이 되어 왕위를 계승함.
📌 후손 중 금성대군은 단종 복위 운동에 가담했다가 사사됨.
📌 안평대군은 학문과 예술에 능했으나 계유정난 때 숙청됨.
👑 세종대왕 가계도를 보면 조선 왕조의 중요한 흐름을 이해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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