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양녕대군 폐위 충녕대군 세종대왕의 형 양녕대군 어리 사건

메모리투데이 2025. 2. 25.
반응형
이 블로그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음슴체'를 사용하며, 다소 낯설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높이기 위한 표현 방식이니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왕세자로 태어나 왕이 되는 게 당연했던 남자.

하지만 그는 여색의 자유로운 성격 때문에 왕위를 잃고

결국 조선에서 가장 유명한 폐세자가 되어버림.

 

조선의 왕이 될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남자, 양녕대군(讓寧大君).

그의 인생은 그야말로 운명의 롤러코스터였음.

 

그런데 정말 단순히 여자 문제 때문에 폐위된 걸까?

혹시 태종이 일부러 양녕을 버리고 세종을 왕으로 만들려고 한 건 아닐까?

 

지금부터 그 진짜 이야기를 해보자.

왕이 될 운명, 완벽했던 세자 시절

1394년, 조선 건국 후 3년째 되던 해에 태어난 양녕대군.

그의 아버지는 조선의 3대 왕 태종(이방원)

어머니는 원경왕후 민 씨.

 

📌 정비(正妃)의 첫째 아들, 적장자.
📌 태어날 때부터 왕이 될 운명이었음.

 

태종은 세자 문제를 빨리 정리하고 싶었음.

왕자의 난으로 정적들을 모두 제거했기 때문에

"이제 우리 아들 중 하나가 왕이 되겠지!" 했던 것.

 

그래서 태종은 즉위하자마자

1402년, 9살이 된 양녕에게 '이제(李禔)'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바로 다음 해인 1403년 왕세자로 공식 책봉함.

 

어릴 때는 문제없이 잘 컸음.

13살에 혼인.

14살에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외교 경험 쌓음.

아버지가 아플 때는 대신 나라 일을 처리함

 

이 정도면 완벽한 후계자 코스.

이때까지만 해도 왕위 계승에는 아무 문제없어 보였음.

 

그런데...

 

왕이 되기 싫었던 세자, 태종의 기대를 배신하다

어느 순간부터 양녕대군의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함.

 

사냥과 술을 즐기고,

신하들이 바치는 여인들과 어울리며

국사(國事)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음.

 

처음에는 태종도 그냥 그러려니 했음.

하지만 1416년, 구종수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짐.

 

신하들이 "세자 전하가 미녀와 매를 좋아하시니 바치겠습니다~" 했다가

이게 태종 귀에 들어가서 모두 유배형.

 

그런데 이 정도는 약한 사건이었음.

진짜 큰 사고는 바로 다음 해에 터짐.

 

1417년 어리 사건.

 

➡ 세자가 곽선의 첩 '어리(於里)'와 바람이 났음.
➡ 태종이 빡쳐서 세자를 장인 집으로 내쫓음.
➡ 세자가 반성문을 올려서 용서받음.

 

여기까지는 넘어갈 수 있었음.

하지만 1418년에 다시 어리를 불러들임.

그리고 이번엔 임신까지 시켜버림.

 

태종, "이건 안 되겠다."

양녕대군의 출궁을 명령하고 장인은 유배 보냄.

 

그런데...

여기서 양녕대군이 결정적인 실수를 함.

아버지에게 억울함을 호소

양녕대군이 태종에게 "이건 부당합니다!"라는 글을 올림.

"첩 하나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리시면, 잃는 게 더 많습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아버지 마음에 들려고 노력하지 않겠습니다."

 

태종 : "이건 단순한 불효가 아니다. 이건 반항이다."

 

태종은 원래 신하들 앞에서 세자 문제를 감추고 싶어 했음.

그런데 세자가 직접 왕에게 반항하니까 더는 덮어줄 수 없었음.

 

1418년 6월 결국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하고

셋째 아들 충녕대군(훗날 세종)을 왕세자로 책봉함.

 

➡ "나는 차라리 동생이 왕이 되는 게 낫다고 본다."
➡ "어차피 나는 하고 싶은 거 하고 살겠다."

 

양녕 본인도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 같음.

(심지어 양녕이 일부러 폐위될 행동을 했다는 설도 있음.)

 

어쨌든 결과적으로 조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 세종대왕이 탄생함.

폐세자 이후 자유로운 삶

왕이 되지 못한 양녕대군은

한양을 떠나 지방을 떠돌며 살기 시작함.

 

술 마시고

시를 짓고

민간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며 놀았음.

 

즉, '왕이 되기 싫었던 남자'의 꿈을 실현한 것,

 

물론 태종은 아들이 한심했지만

죽을 때까지 양녕을 해치지는 않았음.

 

태종 : "양녕이 계속 폐세자로서 조용히 살면, 왕실을 위협하지는 않겠지."

그렇게 폐세자로서 약 44년간 살다가

1462년 69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함.

 

조선에서 가장 오래 산 왕족 중 하나가 됨.

양녕대군은 진짜 문제아였을까?

"여색을 탐하고 방탕해서 왕이 되지 못했다!"

"자격 없는 폐세자였다!"

 

이런 평가가 많지만

다른 시각에서 보면 '스스로 왕이 되길 포기한 남자'라고도 볼 수 있음.

 

양녕대군은 정치 싸움에 휘말리기보다는 자유로운 삶을 원했음.

아버지 태종도 결국 양녕을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둠.

결과적으로 세종이 왕이 되면서 조선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갔음.

 

만약 양녕대군이 왕이 됐다면?

세종대왕이 이룬 위대한 업적이 없었을 수도 있음.

조선의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 수도 있음

 

결국 양녕대군의 폐위는 조선 역사에서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함.

그는 조선에서 가장 자유롭게 살다 간 왕족 중 한 명이었다는 것.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