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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 조선 개화의 숨겨진 개화파 스페셜리스트

메모리투데이 2025.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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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수(朴珪壽).

이름만 들어도 실학, 북학, 개화파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요?

1807년에 태어나 1877년까지 살았는데 인생 자체가 조선 말기 19세기의 혼돈과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게다가 조부가 연암 박지원이라니.

이쯤 되면 '실학 DNA'가 제대로 박혀있는 집안이라 봐야겠죠?

 

박규수는 시대의 격랑 속에서 북학과 개화라는 두 물결을 이이면서도 자기만의 유연함과 실용정신, 그리고 진짜 개방적 시각을 보여줬던 인물입니다.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면 '개화파의 사부', '청년 개화 인큐베이터', '북학과 개화의 다리' 등의 별명이 줄줄이 붙을 인물이었죠.

 

하지만 동시에 시대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조선의 딜레마까지 고스란히 짊어졌던 비운의 현장 증인이기도 합니다.

연암 박지원의 손주라는 타이틀

문익 박규수

박규수의 집안은 금수저집안이기도 하겠지만 실학자 집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부 박지원은 북학파의 대부였고 부친 박종채는 아버지의 업적을 정리하며 실학 정신에 올인한 인물이었죠.

박규수는 어려서부터 내로라하는 지식인들과 교류하면서 자란 인물입니다.

정약용, 서유구, 김정희, 이규경, 남병철, 최한기..

특히 효명세자와 가까워서 효명세자가 직접 박규수 집에 밤마다 놀러 와 토론도 하고 실제로 박지원 문집도 효명세자에게 헌정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효명세자가 급사(1830)하면서 박규수 인생에도 첫 번째 대 위기가 찾아옵니다.

박규수는 이후 18년 동안 은둔하며 지내기도 했죠.

효명세자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조선 정치 지형을 제대로 흔든 사건인 것입니다.

삼정문란과 진주농민봉기의 심판자

1848년 박규수는 은둔생활을 접고 드디어 과거에 급제합니다.

42세 늦깎이 나이로 말이죠.

본격적으로 관료 생활을 시작하게 된 박규수는 용강현령, 부안현감, 곡산부사 등 지방관 경험부터, 경상좌도 암행어사까지 밟게 됩니다.

이때 박규수가 주로 했던 일을 요약하자만 한마디로 

"탐관오리 때려잡기, 백성들 피눈물 닦아주기"입니다.

특히 1854년 경상좌도 암행어사 때 대량으로 지방관들을 잘라내고, 수령의 비리를 적발합니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닙니다.

1862년 조선이 삼정문란(진정, 군정, 환곡의 붕괴)으로 제대로 폭발한 사건이 있었는데

바로 진주농민봉기였습니다.

진주주에서 농민항쟁이 시작되자 박규수는 '안핵사'로 투입됩니다.

진주농민봉기(임술농민봉기)의 수습 총책임 자였던 것이죠.

박규수의 보고서를 요약해 보면

 

"이것은 백성들의 탓이 아니다. 백낙신 같은 탐관오리들이 백성들을 미친 듯이 갈취한 탓이다. 주동자만 처벌하고, 백성들 죄는 가볍게 해야 한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삼정문란의 뿌리를 뽑을 중앙기구(삼정이정청)를 만들어야 한다."

 

사건의 본질을 파헤치고 대책까지 제시한 국정 자문위원 느낌의 행정이었습니다.

 

박규수는 이후로 흥선대원군, 고종 초까지 관직에서 활약하며 경복궁 중건, 평안도관찰사 등 굵직한 자리를 맡습니다.

제너럴셔먼호, 외교적 유연성

1866년 박규수는 평안관찰사로 평양에 부임합니다.

이때, 조선의 운명을 가를 사건이 터지는데요,

바로 미국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평양에 와서 통상을 요구하다 진짜 무법천지짓을 벌이게 됩니다.

이에 조선군 장교를 잡고, 약탈까지 하는데 평양 군민들은 화가 머리끝까지 올라 배에 불을 질러 침몰시킵니다.

이 작전의 실질적 총지휘자가 바로 박규수.

매우 강경한 처사였죠.

이듬해 미군 군함 와추세트호가 조선 연안에 등장하여 제너럴셔먼호의 실종 경위를 따집니다.

박규수는 중국을 경유해 미국에 외교문서를 보내는데 요약하면

"이 배가 미국 것이라는 것도 몰랐을뿐더러 불법 행위를 하기에 불가피하게 응징한 것이다. 우리는 예로 오면 예로 답하고 무력으로 오면 무력으로 맞선다."라는 내용입니다.

실리적인 외교 능력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신미양요 때 미국을 상대하면서도 '일단은 유교적인 예의, 그러나 기본은 실리와 실력!" 

박규수의 이러한 이중전략이 조선 말기 외교의 한계이자 가능성이었던 셈이기도 합니다.

문호 개방과 시대를 읽는 눈

박규수가 진심으로 각성한 때는 1860~70년대입니다.

직접 중국(청나라)도 두 번 다녀옵니다.

1861년 첫 번째 중국행에서는 '영불연합군에게 북경이 털린' 아수라장을 목격합니다.

서양 세력이 동양을 흔드는 현장을 본 것이죠.

두 번째(1872) 중국행에서는 '양무운동'(중국의 서양 따라잡기)이 한창인 시기였습니다.

돌아와서는 중국도 대포와 증기선을 만든다. 이제 서양은 무작정 밀어내기 어렵다는 판단을 합니다.

이때부터 박규수는

"문호를 완전히 닫고 사는 것은 안된다. 하지만 갑자기 빗장을 모두 여는 것은 위험하다. 정책적으로 조심스럽게 단계적으로 가야 한다."라는 입장을 밝힙니다.

특히 일본 메이지유신 때 외교문서를 보내올 때도 

전통에만 매달리지 말고 국제정세에 맞춰서 유연하게 가야 한다. 일본과도 소통 창구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은 강경론이고 대신들은 소심했습니다.

개화파 청년들의 스승

공직을 떠난 후 박규수는 '재동 대감집 사랑방'을 개화 청년들의 공간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여기서 김옥균, 박영효, 박영교, 홍영식, 서광법, 김윤식, 유길준 등 향후 조선을 뒤흔들 개화화 인재들이 모여 공부, 토론 사상을 교류합니다.

박영효의 회고에 따르면

"우리 개화파 신사상은 다 박규수 대감 집 사랑방에서 나왔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박규수는 '지식 네트워크의 허브'였고, '청년정치의 멘토'였습니다.

심지어 중인 지식인인 오경석, 유홍기 등과도 끈끈하게 연결되기도 하여 실제로 '북학파와 개화파를 잇는 징검다리'라는 평이 과장이 아닙니다.

황현은 "상황 따라 바뀌는 기회주의자"라고 비판했지만

김윤식 등은 "진실로 원래부터 개국론자, 시대의 전락가였다" 라면 역설합니다.

이 논쟁 자체가 박규수가 얼마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었는지 보여줍니다.

조선의 경계선, 변화의 징검다리

박규수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시대의 경계에 서서 변화와 전총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한 마지막 북학파, 최초의 개화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학파의 실용정신과 개방성, 그리고 개화파의 선구자 마인드를 동시에 갖춘 인물이죠.

'흔들리는 조선의 미래에 가장 실용적으로 대응한 사상가이자 정치가' 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변화의 징검다리 역할은 항상 외로웠고 때로는 시대의 비난을 받는 자리이기도 했습니다.

요약

  • 박규수는 북학과 개화, 두 시대를 잇는 실용적 리더였음
  • 진주농민봉기 등 내우외환에서 합리적 해결책 제시, 위기관리 역량 탁월.
  • 외교적 유연성과 신중함으로 조선의 문호개방 분위기 조성.
  • 청년 개화파들의 멘토, 재동 사랑방의 주인
  • 시대 변화 속 딜레마와 비판도 함께 짊어졌던 '경계의 사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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