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늑약 주동자와 매국노 을사오적 사진 인물 정리 표
이 블로그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읽기 쉽게 전달하기 위해 '음슴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성했지만 일부 상황 및 표현은 각색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문체가 다소 낯설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높이기 위한 표현 방식이니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1905년, 조선은 마지막으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었던
그 문턱 위에 서 있었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은 더는 가릴 게 없어졌음.
표면상으로는 덴노의 국서였지만
실질적으로는 이토 히로부미를 위시한
일본 수뇌부의 최후통첩이 날아옴.
내용은 아주 간단하고도 명확했음.
외교권을 넘기면 피는 안 볼 것이다."
말이 국서지, 사실상 협박이었음.
이걸 들고 이토 히로부미가 경운궁으로 쳐들어와
고종을 알현함.
경운궁은 이미 일본군이 꽉 잡고 있었고,
고종은 사실상 포위 상태였음.
고종은 처음에는 강경하게 나감.
"이건 나라를 망치는 일이다. 죽어도 못 한다."
이 말, 진심이었을 수도 있음.
근데 문제는 그다음이었음.
결정의 순간이 되자
고종은 인후통을 핑계로 슬쩍 뒤로 빠짐.
그리고 이렇게 말함.
"경들이 대책을 강구해 보시오."
그리하여 조선의 운명을 가를
8명의 대신들이 일본 측과 마주 앉게 됨.
친일의 아이콘, 이완용
그중 단연 눈에 띈 건 학부대신 이완용이었음.
이렇게 주장함.
"어차피 당할 거라면, 최대한 좋은 조건을 얻는 쪽으로 가자."
지금 보면 어이없는 논리지만
당시 일부 고위 관료들 사이에선
이게 '현실적' 대안처럼 보였던 모양임.
결과적으로 이완용이 움직인 그날 이후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 손에 넘어감.
이게 바로 을사늑약, 혹은 을사조약임.
1905년 11월 17일,
조약 아닌 조약이 체결된 날.
근데 중요한 건 이 조약에 황제의 수결이 없었다는 점.
즉, 형식상으로도 완전한 합법이 아니었음.
이토 히로부미는 뒤에서 웃고 있었고,
이완용은 앞에서 조인을 강행함.
그날부터 이완용은 '을사오적'의 선주자로 낙인찍힘.
백성의 분노
을사늑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나라 전체가 폭발함.
지식인, 유림, 평민 가릴 것 없이 들고일어났음.
그중 눈여겨볼 반응은 황성신문 주필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
직역하면 '이 날에 나는 목놓아 통곡하노라'임.
"5적은 나라를 팔았고, 백성은 눈물을 흘리며 울부짖는다!"
검열에 걸려 신문이 폐간되지만
이미 전국에 퍼질 만큼 퍼졌음.
민병환, 조병세, 이상설 등은 자결 혹은 망명으로 항거함.
특히 민영환은 자결하면서 유서에 이렇게 씀.
"나는 이미 몸을 나라에 바쳤다. 살아서 오욕을 견디느니 죽음으로 항거하겠다."
유림들은 유서를 돌려 읽고, 의병들은 산으로 들어감.
을사의병
을사늑약 이후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들불처럼 일어남.
이른바 을사의병임.
평민, 유생, 심지어 어린아이들까지 무장하고 왜군과 맞섬.
대표적인 인물은 최익현, 신돌석, 홍범도 등
이들은 국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전쟁을 시작함.
최익현은 이렇게 말함.
"노인은 늙었어도, 혼은 아직 꺾이지 않았다.
일본이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내 나라를 빼앗는 걸 인정하진 않겠다."
하지만 문제는 병력, 무기, 조직력 모두 부족했음.
일본은 이미 한반도 전에를 군사적으로 장악하고 있었고
의병은 산속에서 게릴라처럼 싸워야 했음.
게다가 고종은 의병을 명확히 지원하지도 않았음.
왕이 싸울 의지가 없는데
누가 끝까지 버틸 수 있었겠음?
정말 인후통 때문이었을까?
을사늑약을 되돌릴 기회는 있었음.
예컨대 고종이 '나 이 조약 인정 못함'이라고 선언했으면,
국제사회에 한마디라도 외교적 항의라도 했으면
상황이 조금은 달라졌을 수도 있음.
실제로 몇 년 뒤 고종은 헤이그 밀사를 파견해서
뒤늦게 국제 사회에 호소함.
하지만 이미 늦었음.
을사늑약은 '기정사실'이 되어버린 것.
이쯤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김.
고종, 정말 인후통 때문이었을까?
아님 무서웠던 걸까?
혹시, 다들 눈치만 보던 와중에
책임을 피하려고 했던 건 아닐까?
고종은 참 특이한 군주였음.
결단력 없고, 우유부단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끝까지 왕권을 포기하지 않음.
기회가 있을 때는 침묵하고,
기회가 사라진 뒤에야 뒤늦게 움직이는 스타일.
누구의 책임이었을까
을사늑약은
하나의 국가가 다를 제국주의 국가에 의해서
외교권을 송두리째 빼앗긴 사건임.
이 사건은 그냥 이완용 개인의 배신만으로
설명할 수 없음.
고종의 침묵, 대신들의 무기력, 지식인들의 분열..
조선 자체의 구조적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순간이었음.
그리고 그 대가는 너무나 컸지.
그로부터 5년 뒤, 조선은 아예 나라 자체를 빼앗김.
한일병합, 1910년.
진짜 나라가 사라짐.
을사오적 인물 정리표
이름 | 직책 | 주요행적 |
이완용 | 학부대신(교육부장관) | 을사늑약 체결 주도 |
박제순 | 외부대신(외교부장관) | 조약 체결 동의 |
이근택 | 군부대신(국방부장관) | 일본 군사 협력 주장 |
이지용 | 내부대신(행정안전부장관) | 친일 정책 실행 |
권중현 | 농상공부대신(농림축산식품부장관+산업통상자원부장관) | 일본 경제 종속 협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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