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수대비 내훈, 조선시대 쎈 시어머니 인수대비와 며느리 폐비 윤씨 이야기
이 블로그는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해 '음슴체'를 사용하며, 다소 낯설거나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역사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높이기 위한 표현 방식이니 너른 양해 부탁드립니다.
며느리가 잘못하면 가르치고, 가르쳐도 말을 안 들으면 때리고, 때려도 안 되면 내쫓아야 한다
이 말을 직접 실천한 사람이 바로 인수대비(仁粹大妃).
왕비가 되지 않고도 대비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진 여성,
폐비 윤 씨를 사사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시어머니
조선의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
사극에서 권력욕 강한 시어머니로 자주 등장하는 인수대비.
그녀는 정말 무섭고 냉정한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조선이라는 시대를 살아내기 위해 강해져야 했던 걸까?
지금부터 그녀의 삶을 들여다보자.
좋은 집안, 탄탄한 배경에서 태어남
1437년, 인수대비는 조선의 명문 가문 청주 한 씨 집안에서 태어남.
아버지 한확(韓確)은 조선 최고 권력층이었고
큰고모와 작은 고모는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었음
즉, "우리 집안은 왕실도 명나라 황실도 쉽게 못 건드린다."
라는 최강의 백그라운드를 가진 집안이었음
이런 집안에서 태어난 덕에 그녀는
📜 어려서부터 유교 교육을 철저히 받았고,
📜 정치적으로도 똑똑한 사람이었음.
이런 배경 덕분에
그녀는 왕족인 수양대군(훗날 세조)의 맏아들 도원군(덕종)과 혼인하게 됨.
그때 그녀의 나이 14살.
(그 시절 결혼은 지금 기준으로 보면 말도 안 되게 빨랐음..)
세조의 왕위 찬탈, 그리고 인수대비의 선택
1453년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고
1455년에는 결국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름.
그녀의 아버지 한확도 여기에 적극 가담하면서
인수대비는 '왕의 며느리'에서 '세자빈'의 격상됨.
이제 남편 도원군이 왕이 될 차례만 남았음.
그런데..
운명의 장난인지 남편이 갑자기 병으로 사망해 버림.
부모님도 연이어 세상을 떠남.
결국 그녀는 왕비가 되지 못하고, 21살의 나이에 청상과부가 됨.
이때 그녀에게 남은 건
큰아들 월산대군
둘째 아들 자을산군(훗날 성종)
그녀는 남편이 왕이 되지 못한 대신
아들을 왕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함.
(이게 나중에 연산군과의 악연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됨..)
성종의 어머니이자 조선의 실세
1469년 조선의 9대 왕이던 예종이 갑자기 세상을 떠남.
예종의 아들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위 계승이 불안정해졌고,
결국 인수대비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이 왕이 됨.
이 사람이 바로 조선 9대 왕 성종.
성종이 즉위하면서
인수대비는 자연스럽게 왕실의 최고 어른이 됨.
왕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대비가 된 특이한 케이스.
즉 왕의 어머니이자 왕실 최고 권력자.
조선의 실세로 자리 잡게 됨.
인수대비 내훈, 여성 교육서를 만든 지식인
인수대비는 권력을 잡기도 했지만 여성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가짐.
1475년
조선의 여성들에게 유교적 덕목을 가르치기 위해
《내훈(內訓)》이라는 책을 직접 편찬함.
"여성도 교육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여성은 유교적 덕목을 지켜야 한다!"
여성 교육을 강조하긴 했지만
그녀가 생각한 이상적인 여성이란 철저히 남성 중심적인 가치관을 따른 여자였음.
"여자가 해야 할 일은 남편을 잘 섬기고, 자식을 잘 키우는 것!"
"며느리가 말을 안 들으면 때려서라도 가르쳐야 함!"
"그래서 나는 내 며느리 윤 씨도 가만두지 않겠다."
며느리 폐비 윤 씨와 갈등, 연산군의 복수
성종의 첫 번째 부인은 한명회의 딸 공혜왕후였는데
일찍 세상을 떠남.
이후 성종의 후궁이었던 윤 씨가 중전이 됨.
바로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 씨.
그녀의 후궁위치에서의 인품은 매우 뛰어났다고 평가됨.
중전이 되는 것조차 자신의 모자람을 말하며 청을 거두어달라 하였음.
이런 모습조차 모두에게 중전의 미덕이라 칭송받으며 회임한 윤 씨가 중전이 됨.
그런데 폐비 윤 씨는 중전에 오르고 온화했던 모습이 확 바뀜.
성종이 후궁들을 총애하자 엄청난 질투심을 보임.
여러 가지 난폭하고 중전답지 못한 모습에 결국 인수대비와 사이가 최악으로 치닫게 됨.
"저 며느리는 조선 왕비의 품격이 없다!"
"내가 직 접 윤 씨를 내쫓아야겠다!"
결국 성종과 인수대비의 손에 의해 윤 씨는 폐위당하고, 사약까지 받음.
문제는 이 윤 씨에게 아들이 있었음
바로 연산군.
연산군은 어릴 때 어머니가 죽은 이유를 몰랐음.
그러다가 왕이 된 후,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됨.
그리고 연산군은 폭군이 되면서 인수대비에게 복수하기 시작함.
할머니를 찾아가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죽였냐!"며 협박.
아버지의 후궁들을 처참하게 죽이고 시신을 능욕함.
결국 충격받은 인수대비는 병을 얻고 6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남.
그런데 연산군은 할머니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음
심지어 "3년상도 치르지 않겠다!"라고 선언해 버림.
인수대비가 폐비 윤 씨를 죽인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된 것.
인수대비는 어떤 평가를 받을까?
"자기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며느리를 폐위시키고 죽이는 데 앞장섰다."
이런 이미지 때문에 사극에서는
'권력욕 강한 독한 시어머니'로 자주 묘사됨.
하지만 반대로,
"조선의 여성 교육을 체계적으로 정립한 지식인이다."
"성종이 안정적으로 왕이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라는 평가도 있음.
결국 그녀는
"조선이라는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누구보다 강해져야 했던 여성"
이라고 볼 수 있음
만약 인수대비가 조금 더 유연한 사람이었다면?
폐비 윤 씨를 죽이지 않았다면?
연산군이 그렇게까지 폭군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음.
그녀의 선택이 결국 조선을 뒤흔든 대참사의 원인이 되었던 것.
"조선에서 가장 센 시어머니" 그녀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 회자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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