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전개과정 1592년, 바다 건너온 일본과 맞서 싸운 조선의 7년 전쟁 이야기
1592년 4월, 일본에서 수만 명의 병사들이 배를 타고 부산 앞바다로 몰려옴.
이게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임진왜란의 시작임.
근데 많이들 임진왜란이라는 이름만 알지, 왜 시작됐고 어떻게 흘러갔으며 조선에 어떤 상처를 남겼는지를 자세히 모르는 경우가 많음.
오늘은 조선과 일본, 명나라까지 휘말린 7년 전쟁, 임진왜란의 전말을 파헤쳐보려 함.
임진왜란 전개과정, 왜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나
전쟁은 그냥 터지는 게 아님.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배경엔 당시 일본 전국시대를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인물이 있음.
히데요시는 일본을 통일하고 나니까 남는 게 군사력이었음.
이 수십만의 대군을 어디다 써먹을까 하다가 명나라 정복이라는 꿈을 품게 됨.
근데 일본에서 명으로 가려면?
당연히 조선을 지나가야 했음.
히데요시는 조선에 "길 좀 빌려줘라" 했지만 조선은 단칼에 거절했음.
결국 명을 치겠다는 핑계로 조선을 침략한 게 임진왜란의 시작임.
조선은 명나라로 가는 길목에 지나지 않는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근데 문제는 조선이 전쟁 준비가 전혀 안 돼 있었다는 거.
선조는 궁궐에서 학자들을 불러놓고 논쟁하는 데만 관심 있었고, 군사력은 형편없었음.
바로 그 허점을 찌르고 일본군이 부산으로 밀고 들어온 거임.
부산진 함락과 조선의 멘붕
1592년 4월 13일 일본군 1차 상륙.
당시 부산진을 지키던 정발이라는 장군이 있었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사함.
부산진, 동래성, 경상도 각지 성들이 순식간에 무너짐.
당시 일본군은 조총이라는 신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는데 화살로 맞서던 조선군은 당연히 상대도 안 됐음.
싸우다 죽을망정 길을 열어 줄 수 없다. -동래부사 송상현, 최후 항전 때-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기도 했지만 초기 대응은 참담 그 자체였음.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줄행랑쳤고 백성들은 무방비 상태로 일본군의 칼날에 무너져 내렸음.
이때 이미 전쟁의 주도권은 일본에 넘어간 상태였음.
바다에서 빛난 이순신과 조선 수군
그런데 절망뿐인 상황에서도 희망의 불씨는 있었음.
그게 바로 이순신과 조선 수군임.
육지는 일본이 휩쓸었지만, 바다에서는 조선 수군이 완전 다르게 싸웠음.
이순신은 철저한 준비와 정보전으로 일본 수군의 동선을 읽었고, 한산도 대첩, 명량해전 같은 전설적인 승리를 거둠.
특히 거북선이라는 혁신적 전함까지 투입해 일본 수군을 압살 했음.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 -이순신, 명량해전 직전 장계 중-
바다를 장악한 덕에 일본군은 보급로가 끊겼고, 육지에서도 조금씩 반격의 기회를 잡게 됐음.
이순신의 존재가 전쟁의 흐름을 뒤흔든 건 두말할 필요도 없음.
명나라 참전과 국제전으로 번진 전쟁
조선 혼자 일본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국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함.
명군이 참전하면서 전쟁은 조선과 일본의 싸움에서 동아시아 국제전으로 확대됨.
근데 명군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었음.
조선과 전술도 안 맞고, 서로 불신하고, 일본군 상대로로 고전함.
특히 벽제관 전투 같은 전투에서는 명군이 처참하게 깨지기도 했음.
조선과 명나라가 합세하면 일본군 따위 문제없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
근데 이 말은 현실과 달랐음.
결국 명나라의 병력과 조선 수군, 전국의 의병들이 힘을 합쳐서 조금씩 전세를 뒤집었음.
정유재란과 7년 전쟁의 끝
1593년 휴전 협상이 시작됐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끝까지 명 정복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음.
1597년 다시 전쟁을 일으켰고, 이게 정유재란임.
이순신은 억울하게 감옥 갔다가 다시 복귀해서 명량해전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둠.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일본군은 철수하면서 7년 전쟁은 막을 내림.
하지만 조선 땅은 이미 초토화됐고, 수십만의 백성들이 목숨을 잃었음.
나의 죽음은 조선을 구할 것이오
이순신, 노량해전 전사 직전
임진왜란이 남긴 교훈
임진왜란은 국가의 안보는 준비된 힘에서 나온다는 것, 그리고 국민과 함께 싸우지 않으면 나라를 지킬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보여줬음.
그리고 국가 지도자의 리더십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이 전쟁이 남긴 커다란 교훈임.
전쟁의 폐허에서 조선은 국방 개혁과 실학 같은 새로운 흐름을 만들기도 했지만 상처는 오래갔음.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는 누군가가 피 흘려 지킨 결과라는 것을 잊지 않기를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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